慶州로 관한 崔氏는 우리나라 모든 崔氏의 大宗으로 新羅 개국전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공(突山 高墟村長 蘇伐都利公)을 득성원조(得姓元祖)로 하고 그의 후손인 문창후 諱 치원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비교적 다른 성씨에 비하여 고려이후 조선이 개국되면서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써 많음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국난에 처 할적 마다 충의 열사가 지방도처에서 궐기하여 가산은 물론 가솔까지도 돌보지 않고 활약하였다. 이는 오직 구국의 일념에서 우러난 충정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왔으며 두려움을 모르고 왕 앞에서 직언하는 기질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불의에 굴할 줄 모르는 품성에서 대변해 주고 있다. 비단 慶州崔氏뿐 아닌 거의모든 崔氏의 기질이며 품성이라 하겠으며 가위 崔氏다운 명문의 전통이 아닌가 사료된다.

시조인 문창후 휘 치원은 12세의 어린나이로 이역 수륙만리를 이웃고을에 가듯이 당나라에 유학길을 떠나 심신을 연마하고 오직 학문에만 심취하여 육년을 하루같이 학문연구에 열중한 끝에 당시 중원의 대국인 당나라 과거에 단번에 급제하여 당나라에서 선주률수현위(宣州溧水縣尉)로 부임하여 승무랑시어사내봉공에 이르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는 특전의 영광을 가졌다.

당나라에서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마도총 고련이 이를 토벌할 때 公이 반괴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황소가 이 檄文을 받아보고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하는 명문을 지음으로써 당 천하에 문명을 떨쳤으며 그 후 귀국하여 신라 진성여왕 에게 시무십여조의 상서를 올려 난세의 국정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져 가는 조정에서 시행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山水間을 해매며 정자에 오르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세월을 보내던 중 가야산으로 들어간 후 뒷 소식이 없어 그의 종적(蹤跡)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가 남긴 문장과 필적은 오늘날 학문의 조종(祖宗)으로써 만인의 추앙을 받고 해동의 명인으로 문묘(文廟) 배향되어 전국 유림의 행사로 춘추에 봉향하고 있으며 그 학문은 영세불멸의 교훈이 되고 있다

또 당대의 학자이었던 휘(諱) 승우(承祐)는 당니라에 유학하여 삼년만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고 휘(諱) 언휘(彦撝)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고려가 개국하자 태자태전에 올라 고운선생과 더불어 당대 삼최로 문명을 떨쳤다.

문창후의 손자인 승로(承老)는 신라 원보 휘(諱) 은함(殷含)의 아들로 12세에 논어를 암통하여 고려태조 에게 경탄을 받고 원봉성 학사에 올랐으며 특히 시무제28조를 올려 고려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후손인 관가정공(觀稼亭公) 휘(諱) 청(淸)은 고려말에 검교정승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사성공(司成公) 휘(諱) 예(汭)는 조선조 초에 淸白吏로 유명하였고 그의 손자인 정무공 휘(諱)진립은 조선 선조조에 무과에 올라 정유재란 때에 서생포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권율장군과 함께 도산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선무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합천 싸움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순절한 후 정백리에 록선되었다 그리고 사성공 후손으로 수운 휘(諱) 제우는 동학의 창시자로 인내천의 교리를 내세워 보국안민의 대도를 포교하여 종내는 동학혁명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굴욕적인 일제 치하에서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남모르게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 자금을 아낌없이 헌금하여 뒷 밪침하였다는 慶州의 십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고 십이대에 이은 만석꾼 최 준이 있다. 해방후 상해임정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선생께서 고국 땅에 첫발을 재딛고 곧바로 慶州땅으로 달려가 손을 마주 잡고 서로 감격하였다는 바 이 역시 사성공의 후예로 慶州시 교동에 자리한 그의 저택은 1969년에 문화공보부에서 신라의 집으로 선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화숙공 휘(諱) 현우의 후손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제 일인자로 추앙받는 면암 휘(諱) 익현은 조선조말 철종조에 문과에 올라 사헌부 장령으로 재임시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다가 한때 제주도로 유배되어 가기도 하였으나 그 후 풀려났으며 고종 31년에 갑오경장을 시작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내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커락은 못 자른다” 하며 대항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혈전중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어 갔다. 배일(排日)의 거두답게 그곳에서 주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하던 중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이 부산포에 운구되자  조국의 동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운집해 통곡하였는데 그 곡성은 산천을 진동 시키고 눈물은 한으로 맺혀 부산땅을 적시었다는 기록과 함께 선생께서 순국하신 병오년 11월17일 인시에 누구보다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했다는 그 만사와 원세개의 만사가 전하기에 등재한다.

伊藤博文 輓詞

起拜韓王又哭供 (대한 왕께 절올리며 님을 위해 곡 하올제)

臨風새淚雨蒼空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오네.)

名山何處占幽宅 (고국땅 그 어느곳에 님의 유택 정하올가)

坐以夷西向魯東( 그 좌향 묻지말라 백이의 서산에서 어중운의 동해여라)

 

한편 광복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서 환국하자 당시 주석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이시영선생등 임정요인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1946년 4월23일을 기하여 맨 먼저 면암선생의 위폐가 봉안된 묘덕사에 찾아가 환국신고제를 올렸다 하니 이는 분명 민족사의 정통성을 밝히는 증언의 현장으로서 앞으로 거국적 추모의 기향화가 천추만대에 끊임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고유제문(告由祭文)에 의하면 민족의 이름으로 정성을 다하여 간략하게 제를 올리고 있아오나 차후 우리 정부가 수립되는 데로 다시 국가적인 공무행사로서 예를 갖추어 올리겠습니다라고 고유한지 43년이 지난 1989년 4월13일자로 우리 정부가 새로이 중건 단장한 묘덕사에 국가에서 정한 선생의 표준영정을 봉안하고 정부요인이 참석하여 국가의 대제례를 올렸으니 이 또한 우리 민족사의 일관된 민족정기를 불러 일으킨 쾌거의 장이었다 할 것이다.

충열공 휘(諱) 광위는 초휘(諱)가 광훈으로 고려 명종조에 왜적을 토평한 공으로 광위로 사명되고 상장군을 거처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군되었으며 그의 후손 휘(諱) 형한은 호가 영사정으로 연산군조에 군에게 왕도가 무너지는 것을 한탄하면서 백관의 법도와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직언을 거듭하며 단하에서 부복하여 충언하였으나 가급되지 않자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하며 이 외에 고려 정치사에 빛나는 휘(諱) 량 휘(諱) 여해 등을 비롯하여 문명을 떨친 휘(諱) 백윤 그리고 조선조에 창의한 절의의 신하 휘(諱) 동보와 선조조의 선무공신 경상우후 휘(諱) 봉천 병조참판에 추증된 휘(諱) 중복 한말의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휘(諱) 창식 휘(諱) 봉환,등은 慶州崔氏가 배출한 명사들로서 그들의 기개는 崔氏의 맥을 이어받은 충직한 명문을 더욱 빛나게 하여 세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